고종황제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인 아관파천(俄館播遷)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당시 조선정부는 일본과 을미사변 이후 친일내각 구성 및 단발령 시행 등 일련의 개혁조치를 단행하였다. 이에 대해 국민들이 반발하자 김홍집 내각은 일시적으로 해산되고 박정양·이완용·윤치호 등 친일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나 곧이어 1896년 2월 11일 새벽, 이범진·이완용 등 친러파 세력 중심의 제4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1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면서 이른바 ‘아관파천’이 이루어졌다.
왜 하필 러시아 공사관인가?
당시 미국공사 알렌은 “러시아 정부가 한국 내에서의 정치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국왕에게 접근했다”고 말했다. 또한 대한제국 시기 주한미국공사였던 호러스 뉴턴 알렌 역시 자신의 저서 《알렌의 일기》에서 “조선 왕이 궁궐을 버리고 외국 공관으로 도피한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라고 서술하며 이를 정당화했다. 즉, 국내정세 불안이라는 현실 속에서 신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탈출했나?
1896년 2월 11일 오전 9시 경, 어가 행렬이 돈의문을 통과하려 하자 군중들이 길을 막았다. 그러자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나서서 백성들을 설득했고, 결국 10시경 경복궁을 출발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병력 약 400명이 호위했는데, 광화문 앞에서는 시위대 병사 300여 명이 시위를 벌이며 저지하기도 했다. 한편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살해되자 군부대신 안경수가 후임 연대장으로 임명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날 아침 일찍 일어난 군인들은 대부분 새로 임명된 신임대장 휘하에 있었고, 심지어 전날 밤 군복을 지급받은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신임연대장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일부 군인들은 이미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한편 서울 시내 각처에서도 의병부대가 일어나 무장투쟁을 벌였다. 특히 동대문 밖 청량리 일대에선 경기도 양주 출신의 유생 이소응이 이끄는 의병 수백 명이 모여 관군과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12시경 정동에 있던 러시아 공사관 근처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한 무리의 군사들이 나타나 총격을 가했다. 당황한 일행은 일단 몸을 숨겼다가 다시 나와 보니 이번엔 다른 부대가 총을 쏘며 공격해 왔다. 이렇게 몇 차례 공방전이 벌어지다가 마침내 오후 1시경 서대문 쪽으로 빠져나와 무악재 고개를 넘어 홍제원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은 후 휴식을 취하던 중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번째 군대가 나타났다. 처음과는 달리 많은 수의 병력이었고,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겁에 질린 나머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이로 인해 황제 일행은 무사히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누가 제일 먼저 알았나?
《독립신문》은 파천 소식을 듣고 즉시 서재필 박사 주재 하에 독립협회 회원 일동 명의로 된 〈아관파천 성토문〉을 발표했다. 이어 윤치호 · 이상재 · 남궁억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회의를 개최했으며, 당일 저녁 7시부터는 종로 보신각 앞에서 시민대회를 열어 규탄시위를 벌였다. 다음날인 2월 12일에는 황성신문사 주최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고, 13일에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상소문의 내용을 검토하였으며, 14일에는 의정부 의정 심순택이 직접 상경하여 회의를 열었다. 15일에는 중추원 의장 김윤식 이하 모든 관료들이 출근을 거부함으로써 사실상 업무가 마비되었고, 16일에는 조병식 총리서리가 사임의사를 표명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7일에는 학부대신 이완용이 사직상소를 제출했지만 반려되었으며, 19일에는 농상공부대신 송병준이 사표를 제출하였으나 수리되지 않았다. 22일에는 참정대신 한규설이 사퇴 의사를 밝혔으나 마찬가지로 반려되었다. 23일에는 탁지부대신 민영기가 사직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거절당했다. 24일에는 외부대신 박제순이 사직하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허락되지 않았고, 25일에는 내부대신 유길준이 사직하겠다며 휴가를 요청했지만 불허되었다. 26일에는 육군참장 이학균이 면직을 요구했다가 오히려 파면당했고, 27일에는 이근택이 자결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다. 28일에는 이용익이 자살시도를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29일에는 이재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31일에는 김가진마저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역사속에서 너무나 안타까운 순간이지만, 아쉬운 점은 좀 더 빨리 나라 안팎의 문제를 해결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