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사육신_조선 전기 충절을 지킨 신하들 1.

by MIJINY 2023. 6. 26.
반응형

조선시대 세조 때 단종 복위운동을 하다가 죽은 충신들을 사육신이라고 부릅니다. 이 중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6명은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했습니다. 당시 왕이었던 세조는 자신에게 반대하던 신하들을 죽였고, 결국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훗날 세종대왕과 문종 임금께서 아끼던 황보인, 김종서 장군 등 많은 대신들이 죽고 나서야 후회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유례없는 왕위찬탈 사건인 계유정난(1453) 이후 수양대군 일파에 의해 희생된 수많은 인물 가운데 대표적인 여섯 명을 가리켜 사육신이라 칭하였습니다. 

 

사육신이란 누구인가요?

사육신은 1456년 6월 1일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자 이를 개탄하며 세상을 떠난 여섯 명의 신하입니다. 원래 이름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이며 후에 김문기가 추가되었습니다. 이때 생육신이라는 말도 생겨났는데,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입니다.

 

성삼문

성삼문은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이자 세종대왕의 맏아들인 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형인 양녕대군 밑에서 자랐습니다. 1394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신숙주와는 오랜 친구 사이였습니다. 또한 최항, 정인지, 박팽년, 신숙주, 이개, 이선로 등과 함께 『동국정운』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명나라 사신과의 마찰로 인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충청남도 홍성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에 몰두하기도 하였습니다.

 

박팽년

박팽년은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은 학자로서 뛰어난 학식과 인품을 지녔습니다. 특히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성품이 온화하고 신중했습니다. 그리고 한글 창제 과정에서도 큰 공을 세웠습니다. 여러 차례 벼슬길에 올랐으나 거듭되는 좌천으로 인하여 불만을 품었고, 마침내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으려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하위지

하위지는 고려말~조선초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이고 자는 순경입니다.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신동 소리를 들었고, 음률에도 밝았습니다. 일찍이 정몽주, 이색, 권근 등 당대의 석학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며, 15세 되던 해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습니다. 사헌부 감찰, 성균관 박사, 예조좌랑, 공조좌랑 등을 역임했으며, 경자사화 때 동생 하연과 함께 화를 입었습니다. 다시 복직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하였다가 나중에 이조참판에까지 올랐습니다.

 

유성원

유성원은 호는 묵재 또는 삼족당 혹은 백옥헌입니다. 시호는 충렬공으로 성종 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참형을 당했습니다. 문장과 서예에 능했고, 천문, 지리, 의약, 복서, 산수 등 자연과학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중국어 역관으로서 활약하면서 외교문서나 외국사신 접대 문서를 많이 썼습니다. 저서로는 『묵재일기』가 있습니다.

 

유응부

유응부는 호가 매죽헌·매죽당이다.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겸 홍문관 제학 유의손이며, 어머니는 여흥 민 씨로 영의정 민정 중의 딸입니다. 12세에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 류복립에게서 수학하였는데, 성격이 활달하고 도량이 넓어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17세에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광해군 10년 기묘사화로 스승 김굉필이 처형당하고 가족 모두가 귀양 가자 은거생활을 했습니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 원종공신 1등에 책록 되고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정원 주서, 예문관 검열, 춘추관 기사관, 병조정랑, 교리, 응교, 동부승지, 대사간, 부제학, 호조참의, 우부승지, 한성부우윤, 경상도관찰사, 함경도관찰사, 강원도관찰사, 동지돈령부사, 개성유수, 강화유수, 평안도관찰사, 수원부사, 경기도관찰사, 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중추부지사, 의정부영사, 지춘추관사, 경연특진관, 세자빈객, 동지성균관사, 장례원판결사, 장악원정, 종부시판사, 돈령부판사, 육조판서, 지경연사, 사은정사, 종묘배향공신, 청백리 등을 지냈습니다.

 

이개

이개(李塏) 선생은 세종대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세조 2년 단종 복위운동 실패 후 처형당했습니다. 이후 숙종때 복권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습니다. 본관은 한산이며 자는 청보(淸甫), 호는 백옥헌(白玉軒)입니다.

 

단종 즉위 초 권력을 잡은 세력은 대부분 공신세력이었고, 이로 인해 신진 관료층이던 지방 출신 인사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정치권 내부의 알력다툼 속에서 발생한 붕당정치의 폐해 역시 심각해서 조정 내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중앙 정계 진출 기회를 얻지 못한 일부 선비들은 현실 사회에 대한 불만과 좌절감을 표출하기 위해 무리한 행동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하였던 것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