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장군 하면 떠오르는 단어 중 하나인 위화도 회군입니다. 고려 말 요동정벌을 위해 출병했다가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온 사건입니다 이 일로 인해 최영과 우왕 등 기존 세력들이 몰락하고 신진사대부(신흥무인세력)였던 이성계가 권력을 잡게 됩니다. 이후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이성계는 굳이 요동정벌을 하려 했을까? 그리고 이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누구였는지 지금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최영은 누구인가?
1352년 아버지 최원직(崔元直)과 어머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난 최영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하였으며 특히 활솜씨가 뛰어나 명궁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18세 때 음서로 벼슬길에 오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중에까지 올랐습니다. 당시 원나라 세력이었던 쌍성총관부 지역을 공격하여 탈환하는데 큰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북쪽 국경지역에서는 여진족들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 일대 영토를 확장시켰습니다. 이러한 공로로 명나라로부터 '철령위'라는 땅을 받아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명의 철령 이북땅을 차지하겠다는 의도였습니다. 이때 최영은 이를 강력히 반대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복귀되어 요동성을 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신진사대부였던 이성계와 뜻이 맞아 손을 잡게 되었고 마침내 이인임 일당을 제거하면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위화도 회군이란 정확히 어떤 사건인가?
1388년 5월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원나라에게 빼앗겼으니 이를 반환하라고 요구했는데, 이것을 거절하자 명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전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고려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명나라는 원나라를 멸망시킨 신흥강국이었고, 우리에게는 사대관계를 강요하며 조공을 바치라고 압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왕이었던 우왕은 외교문제보다는 당장 눈앞에 닥친 국가재정 문제 해결에만 급급했고, 결국 명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그러자 대표적인 친명 파였던 최영장군이 나서며 군사를 이끌고 요동정벌을 떠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위화도 회군입니다.
왜 하필이면 요동정벌이었을까?
당시 중국 대륙은 원나라 말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한족 출신 주원장이 반란을 일으켜 난징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면서 국호를 홍건적이라 했습니다. 홍건적은 순식간에 북쪽 지역을 휩쓸었고, 1359년에는 베이징 근처까지 진출했습니다. 한편 남쪽에서는 몽골족 왕조인 원나라가 쇠퇴하고 있었습니다. 쿠빌라이 칸 사후 후계자 다툼이 벌어지면서 내분이 일어났고,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했습니다. 고구려 말 공민왕 때 쌍성총관부를 공격해서 영토를 회복하기도 했던 고려 역시 이러한 정세 변화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북진정책을 추진했습니다. 특히 서북면 병마사였던 이성계는 여러 차례 요동성을 공격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요동정벌 주장이 나오게 된 겁니다.
반대 의견은 없었나?
우선 대부분의 신하들은 전쟁 준비 기간이 너무 짧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또한 장마철인데다가 전염병 우려도 있었기 때문에 무리한 원정이었다고 비판했습니다. 게다가 만약 명이 정벌을 허락한다 하더라도 실제로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제기되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신하들이 거세게 반대했으나, 우왕과 최영은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총사령관 격인 팔도도통사에 최영을 임명함으로써 요동정벌을 강행하였습니다.
결국 이성계는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왔고, 이로 인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즉, 쿠데타를 일으킨 셈입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이게 바로 새 왕조인 조선의 건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