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조선 15대왕 광해군 엿보기

by MIJINY 2023. 6. 9.
반응형

광해군의 즉위

임진왜란 당시 선조 다음으로 즉위한 왕인 광해군은 조선시대 최초로 방계 출신 임금이었습니다. 아버지였던 선조는 후궁 소생이었고, 어머니 역시 궁녀였기 때문에 서자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정통성 문제로 늘 불안감을 가지고 있던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신하들의 반발이 심했고, 결국 1608년 2월 1일 선왕이었던 선조가 승하하자 겨우겨우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반정세력이었던 서인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인 중심의 인사개편을 단행했습니다. 이것은 곧 서인과 남인 간의 정치적 갈등을 불러왔고 급기야 당쟁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대북파는 이이첨, 정인홍 등 강경파였고 소북파는 유영경, 허균 등 온건파였는데 둘 사이의 의견차이가 컸고 서로 견제하다가 끝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한편 광해군은 궁궐 공사에만 몰두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실제로는 창덕궁 재건사업 이외에도 내의원 설치, 동의보감 편찬, 양전 사업 실시, 대동법 확대시행 등 여러 가지 개혁정치를 추진했습니다.

 

백성들을 위해 펼친 정책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에게 한양이 함락되자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였고 명으로부터 원병을 받아 평양성을 탈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의병장들이 활약하였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곽재우 장군입니다. 또한 이순신 장군 역시 옥포해전, 한산도대첩 등 수많은 해전에서 승리하며 일본과의 전쟁에서 큰 기여를 했습니다. 한편 명나라와의 관계에서도 중립외교를 펼치며 실리를 추구했는데 이로 인해 명이 지원하기로 했던 군대 파병을 하지 않게 되었고 결국 전세는 역전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광해군은 대동법을 실시하여 조세부담을 줄여주었습니다 공납제도라는 제도 아래 각 지역 특산물을 세금으로 납부해야했는데, 이게 너무 과중하다 보니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습니다. 심지어 쌀 한 톨 나지 않는 강원도 산골마을에선 나무껍질 같은 걸 바쳐야 했습니다.

 

따라서 국가재정 확충 및 민생안정을 위해 토지 결수에 따라 쌀(혹은 동전)으로 세금을 내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대동법입니다. 물론 처음엔 반대여론이 거세었지만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가면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군역제도를 개혁하여 양민이라면 누구나 군역을 지게 하는 호패법을 시행하였으며 허준 선생의 동의보감 편찬을 후원하기도 하였습니다.

 

광해군의 외교 정책

당시 국제정세는 만주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여진족이 세운 후금(청)과 명나라가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1616년 누르하치가 건국한 후금은 세력을 키워가면서 점차 중국 대륙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망을 드러냈습니다. 그러자 명나라는 서둘러 후금을 공격하려고 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요동 지역마저 빼앗기게 됩니다. 게다가 막대한 배상금까지 물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후금은 계속해서 영토를 확장시키면서 강해지고 있었고 주변국들로부터 조공을 받으며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청나라 입장에서는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즉, 청나라는 내부 결속을 다지고 외부 위협으로부터 안전해지기 위해서라도 먼저 조선을 침략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해군은 두 차례의 호란 모두 평화롭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는 일본에게 패배하면서 국력이 많이 약해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명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선조는 이를 거부했고 결국 일본군이 한양까지 쳐들어오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해군이 승리하며 전세가 역전되었고 의병활동 및 관군의 활동으로 인해 전국토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국가재정 또한 바닥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명이 무리하게 파병을 요구하자 광해는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보냈지만 오히려 대패하였고 이로 인해 많은 군사들을 잃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도와주었던 명의 은혜를 저버렸다는 비난을 받게 되고 심지어 왕자시절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기도 한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 등 폭정을 일삼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민심은 점점 광해군에게서 멀어졌고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오늘날 광해군이라는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폭군’ 혹은 ‘비운의 왕’입니다. 그러나 시대상황이 좋지 않았을 뿐 실제로 광해군은 성군이었습니다. 만약 그때 상황이 좋았다면 광해는 세종만큼이나 훌륭한 임금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