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 중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인 정조 대왕(1752~1800)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태어나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의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인 영조 임금과 어머니 혜경궁 홍 씨 사이에서 갈등하며 여러 가지 개혁 정책을 펼친 군주입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정조의 생애를 살펴보며 당시 시대 상황 및 정치사 등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장기
정조는 1752년 8월 25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산이고 자는 형운이며 호는 홍재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던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매우 총명하였고 학문을 좋아하였습니다. 또한 무예나 활쏘기 실력도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인 정순왕후의 손에서 자라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10세 때부터는 동궁으로서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제왕학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5세 되던 해인 1762년 윤 5월 13일 생부인 사도세자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자 11세였던 정조는 큰 충격을 받게 되고 2년 동안 칩거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고 학업에 정진하였으며 즉위하기 전까지 꾸준히 독서를 하며 학문의 깊이를 더해갔습니다.
정치와 민생
24세이던 1776년 3월 5일 마침내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한 정조는 곧바로 규장각을 설치합니다. 규장각은 역대 국왕의 시문과 글씨·그림·어필 등을 보관하던 왕실 도서관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정조는 인재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썼으며 새로운 서적들을 편찬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중국으로부터 수입되던 책들이 대부분이었던 당시에 국내 학자들에게 저술 활동을 장려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얼 출신이라 하여 관직 진출에 제한을 받았던 사람들에게도 기회를 제공하면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사회에 변화를 꾀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수원 화성을 건설하여 군사 훈련 장소로 활용하거나 장용영이라는 친위 부대를 창설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민생 재위 기간 내내 탕평책을 실시하여 당파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 하였으며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담은 수령칠사를 반포하고 암행어사 제도를 부활시켜 지방 곳곳을 직접 살피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켜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해결하도록 하였고 노비제도를 개선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신해통공을 실시하여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을 폐지시킴으로써 상업활동을 자유롭게 하도록 하는 등 경제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외교정책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의 관계를 원만히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청과의 교류를 확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경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던 청나라 장수 용골대와도 친분을 쌓았습니다. 그래서 훗날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한 지 45년 만에 처음으로 신하로서 청나라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겪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던 정조는 1800년 6월 28일 49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기에 독살설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명확한 증거는 없습니다. 다만 사망 직전 종기로 고생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론
정조는 짧은 재위기간 동안 수많은 업적을 남기며 조선 후기 중흥기를 이끌었습니다. 비록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후대에 의해 ‘개혁군주’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실제로는 노론 벽파로부터 끊임없이 암살 위협을 받으며 불안정한 정국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어쩌면 정조 역시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좌절해야 했던 비운의 군주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